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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꽃다리에 대한 기억

조은글

by 여리챨리 2007. 6. 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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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꽃다리에 대한 기억

박수현

수수꽃다리 숨결이 꽃불처럼
도서관 앞길에서 로터리로 번지는 벤치에 앉아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영문의 이니셜로 기록된 너가 누구인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갈피갈피 얼굴 없는 그림자가
누런 일기뭉치에서 걸어나와 내 손을 잡는다
지난 시간들이 신열을 앓으며 다리 위에서 출렁인다
너는 누구인가?
너무 싱그러워 때론 현기증도 나던
수수꽃다리 꽃 피어오른 오월의 어느 날,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보아도
몇 마디의 방백만 허공에 울릴 뿐
펄럭이는 너의 옷자락은
무심히 무대 뒤로 사라진다
길을 놓쳐버린 젊음만 무대 위에 쓸쓸하고
짧았던 축제도 막을 내렸다
불이 꺼지고 징소리는 느릿느릿 길을 떠난다
징의 긴 울림 속 너의 그림자를 따라
아직 끝나지 못한 일기를 쓰노라면
내 안의 모든 구석이 될 풍경 하나
설핏 새벽 잠든 머리맡에
뜨거운 한 발쯤 내디뎌 줄 것인가


본명 : 박현주
경북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 졸업
2003년 <시안>으로 등단
현재 [겨울숲], [온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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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수수꽃다리는 과거의 기억과 오늘을 연결시켜주는
시적 매개체로 기능하고 있다.
수수꽃다리가 참으로 현기증나게 피어나던 그 시절,
우리들의 사랑도 때로 현기증나도록 깊어갔으리라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무슨 관계였더라?
기억마저 아슴아슴하도록,
세월의 징소리와 함께 그 시절의 짧았던 단막극은
그렇게 끝이 났으리라
수수꽃다리 향기 곱던 날,
몇 마디의 쓸쓸한 방백만 남기고
느릿느릿 먼길을 떠났으리라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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